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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인문학도 김명환의 블로그입니다.

“그래서 넌 누굴 사랑하는데?” – 회피형(?) 남자는 어떻게 『무정』해지나

1. 사랑은… 국밥 같은 것

대체 자기는 누구를 사랑하는가. 선형인가, 영채인가. 영채를 대하면 영채를 사랑하는 것 같고 선형을 대하면 선형을 사랑하는 것 같다. […] 자기는 선형과 영채를 둘 다 사랑하는가. 그렇다 하면 동시에 두 사람을 다 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 남들이 하는 말을 듣거나 자기가 지금껏 생각하여 온 바로 보건대 참된 사랑은 결코 동시에 두 사람 이상에 향할 수 없는 것이어늘 지금 자기의 마음은 어떠한 상태에 있나. 아무렇게 해서라도, 어떠한 표준을 세워서라도 형식은 선형과 영채 양인 중에 한 사람을 골라야 하겠다. [114화]

고등학교 때 문학 공부깨나 한 사람이라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소설이라던 이광수의 『무정』을 얼핏얼핏 기억할지 모르겠다. 『무정』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1917년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총 126회차 분량으로 연재되며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과연 근대소설 아니랄까 봐 지금 보아도 급진적인 질문을 작가는 주인공 형식의 내면에서 펼쳐내고 있었다.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선형의 영어 개인 교습을 맡은 경성학교 교사 형식에게 옛 은사의 딸인 영채가 찾아온다. 영채는 형식과 결혼하라던 어릴 적 아버지의 농담을 기억하고 형식을 위해 절개를 지켜 왔지만, 형식의 동료 교사에게 강간을 당하자 자살 결심을 알리는 유서를 남기고 평양으로 떠난다. 영채의 죽음에 슬퍼하던 형식에게 김 장로가 딸 선형과의 약혼 및 미국 유학을 제안하고, 형식은 제안을 수락한다. 그러나 영채는 사실 살아 있었다. 평양행 열차에서 선형의 친구이자 동경 유학생인 병욱을 만나 그동안의 정절이 헛된 구습의 산물이었음을 설득당했기 때문이다. 병욱이 영채를 동경으로 데려가려 출발하는 날, 두 사람이 올라탄 기차에 미국 유학길을 나선 형식도 선형과 함께 탑승했다가 영채와 재회하게 된다. 형식은 고민에 빠진다.

두 사람 이상을 향하는 “참된 사랑”이 존재할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두 여자 중 누굴 사랑하는가. 다자연애를 긍정할 정도로 급진적인 지식인은 아니었으므로 이광수는 형식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선형과 영채 양인 중에 한 사람을 골라야 하겠다.” 그런데 이런 말은 좀 이상하게 들린다. 둘 중 누굴 향한 사랑이 진짜 사랑인지가 판정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내가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한다고 느낄 땐 두 사랑이 전부 가짜 사랑인데, 내가 둘 중 하나를 고르는 순간 그쪽만이 진짜 사랑으로 결정된다는 것처럼 들린다. 이 명제가 성립하는 세계에서 진짜 사랑은 내가 증거를 찾아냄으로써 발견되는 대신 결단을 내림으로써 탄생한다. 형식은 선형과 영채 중 결국 누굴 선택할까?

혹시라도 『무정』이 갑분뜬금아몰랑기승전계몽주의소설이라고 기억하고 있다면, 당신 기억이 맞다. 삼랑진에 다다른 기차가 홍수 때문에 난 선로 고장으로 멈추고, 여관에 묵으려 나서던 형식 일행이 자선음악회로 돈을 모아 수재민들에게 국밥을 사 준 후 ‘우리가 조선 민족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보다 문명한 미국과 일본 가서 열심히 배워 오고 조선인을 교육합시다!’ 따위로 더불어 다짐할 때 그 심각하던 연애 갈등은 흐지부지 사라진 상태다. 나무위키에 의하면 모름지기 소설은 교훈을 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맛이 간 이광수가 판이 너무 커져 버리자 날림으로 결말을 낸 거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던데, 과장을 덜고 보더라도 삼랑진 수해 장면이 이 소설에 대한 평가를 깎아먹고 있는 건 사실이다. 결말의 구조를 분석하고 의의를 구제하려는 몇몇 연구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랑에서 민족애로의 급전환 때문에 이전까지의 문학적 역동성이 좀 부자연스럽게 봉합되긴 했다는 견해가 김동인 이래로 오래도록 중론이었다. 그런데 이 결말의 설득력과 별개로, 나는 난관에 봉착한 이광수가 마지막에 두 손 놓고 폭주해 버린 것은 아니리라고 추측한다. 소설을 유심히 읽어 보면 홍수의 복선 아닌가 싶은 대목이 78화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 둥실 뜬 저 구름아, 비를 싣고서 어디로 가느냐.”

형식과 약혼하는 날 선형이 부르던 노래 가사다. 연재 초반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쩌면 이때쯤부터는 이광수가 삼랑진 수해 장면을 설계하고 있었으리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영채를 살려두고 형식과 선형을 약혼시킨 작가가 영채와의 훗날 재회로 인한 삼각 관계의 점화를 예상하지 못했으리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니까 정황상 이광수는 연애 소설의 다음 화를 위한 아이디어가 막혀서 계몽주의로 도망갔다기보다, 정말로 세 남녀의 삼각 관계를 수재민을 돕기 위한 자선음악회로 해결할 요량이었을 수 있다. 이 기상천외한 기획을 (내지는 급발진을) 기왕의 연구사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간단히 요약하자면, 삼랑진 수해는 연애감정이라는 사적인 정을 공동체적 연대라는 공적인 정으로 확산하는 계기다. 텍스트가 조선 사회와 주인공 형식의 문제를 ‘무정함’으로 진단해 왔다는 점에 비추면 이 기획의 의도가 좀 더 감이 잡힌다. 정(情)은 사적 관계에서 발원하지만 민족을 구제할 힘으로 발전할 잠재력도 있으므로, 도탄에 빠진 조선의 미래를 밝히기 위해서는 공감의 외연을 넓혀야 한다는 일종의 도덕적이면서도 경제학적인 발상을 이광수는 개진하고 싶었던 듯하다. 정이 개인의 덕목을 넘어서 문명의 진보를 추동하는 힘으로 제시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재구성이 이광수를 비판으로부터 안전하게 구제하는 것은 아니다. 연구자들은 언제나 공격 각을 잴 준비가 되어 있고, 개중에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결국 사랑은 민족 계몽을 위한 도구가 된 것인가?

2. 오늘은 사랑하고, 내일은…

형식의 사랑에 왜 계몽이 동원되는지를 이해하려면, 이 소설의 제목이 “무정”인 이유부터 짚을 필요가 있다. 작중 “무정”이란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6화다. 형식이 영채의 아버지이자 개화파 지식인이었던 박 진사가 맞은 비극적 죽음을 회고하는 대목에서다.

“하늘이 뜻이 있다 하면 무정함이 원망스럽고 하늘이 뜻이 없다 하면 인생을 못 믿으리로다.”

봉건적 세계는 권선징악의 세계였다. 물론 현실이 공평하지 않은 것은 전근대도 마찬가지였지만 소설에선 천리가 일을 바로잡아 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선대의 억울한 죽음은 후대의 보상을 통해서라도 갚아지리라고 기대되기 마련이었다. 근대화는 여러 이유로 이런 믿음을 무너뜨렸고, 무너지는 질서의 회복을 하늘이 보증하는 『춘향전』식 결말은 순진한 낙관처럼 보이게 됐다. 박 진사의 억울한 옥사는 고소설 속 주인공의 선친이 겪는 수난담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영채는 옥에서 굶주려 가는 아버지께 따뜻한 밥 한 그릇이라도 얻어 드리기 위해 기생이 되지만 점잖은 줄 알았던 신사가 자신의 몸값을 들고 도망가는 바람에 좌절하고, 박 진사는 영채가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윽박지르며 수치심에 곡기를 끊고 자살한다.

고소설에서라면 효녀라는 내면적 진실이 ‘창녀’라는 외양을 뚫고 승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박 진사는 코드 너머의 진실을 알아보지도, 마침내 구원받지도 못했다. 근대적 세계는 진실을 노출해야 할 하늘이 사회적 기호에 의한 오인을 영원히 방치하는 세계다. 그러면 나의 진심은 타자에게 어떻게 전해질 수 있는가. 소설 밖 독자에게라면 인물의 내면을 풀어 써 줄 전지적 서술자가 있다. 그러나 서술자가 소설 속으로 들어가서 인물을 중재할 순 없는 노릇이다. 영채는 형식을 위해 십 년 가까이 정절을 지켜 왔지만, 그녀가 기생임을 알게 된 형식은 영채의 몸이 이미 ‘더럽혀졌을’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추측한다.

소설의 해법은 두 갈래다. 첫째, 위조하기 어려운 신체와 강도 높은 행위. 말은 속이기 쉬워도 피와 눈물은 쉽게 속일 수 없다. 영채는 형식 앞에서 흐느끼고, 자살 계획을 알리는 절절한 유서를 남긴 뒤 떠난다. 세상 어떤 사람이 자신의 거짓말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리라고 쉽게 판단하겠는가. 형식은 영채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그녀를 구원해야겠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둘째, 듣는이의 슬픔을 자아내는 형식(形式). 형식은 단지 영채의 사연이 슬퍼서가 아니라 그녀의 사연을 풀어내는 말씨로부터 정한이 느껴져서 그녀와 더불어 운다. 두 갈래는 모두 정으로 수렴한다. 피와 눈물, 유서, 예술적 구연은 판단보다 앞서는 감응을 자아내고, 그래서 사회적 코드를 뚫고 나온 진정성의 증거로 채택된다. 문제는 감응도 능력이라는 것이다. 형식은 원체 동정심이 많은 인물이지만 세상에는 그보다 무정한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정의 계발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다. 말하자면 정은 무정해진 세계에서 증식하는 오인을 바로잡고 코드 너머의 진실에 다다르기 위한 인식론적 길이다.

이 모든 것이 형식의 삼각 관계와 무슨 상관인가? 사랑이 정의 일종이라면, 정의 한계는 사랑의 한계를 규정할 것이다. 그리고 정은 자생적으로 지속 불가능하다는 한계가 있다. 영채가 형식의 동료 교사에게 강간을 당한 날, 그녀가 스스로 입술을 깨물어 피를 흘리자 냉혈한이었던 영채의 기생집 ‘어머니’ 노파는 영채를 동정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영채가 눈물을 감추고 얼굴에 분칠을 하자 그녀의 “뜨인” 눈은 다시 영채의 몸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세속적 욕망으로 “감기”고 만다. 영채의 유서를 발견하고 나서야 그녀의 감긴 눈은 다시 뜨인다. 이 사례는 정이 자신을 지속시킬 외부의 동력을 요청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해법이 예술과 교육이다. 이광수에게서 예술은 타자의 고통을 나와 더 가까운 일로 인식하게 만드는 매체이고, 교육은 정을 발현시킬 외부적 계기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제도였다. 정의 자생적 지속이 불가능한 한, 형식이 지금 선형과 영채 중 하나를 선택한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사랑”으로 확정될 수 있을까?

이광수는 사랑이 얼마나 불안정한 감정인지를 알았고, 그래서 지금 누군가를 선택함으로써 형식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을 수 있다. 내가 지금 둘 중 한 사람을 선택하더라도, 앞으로도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남는다. 수재민을 돕기 위한 자선음악회는 예술 공연장을 정의 배양실로 만들기 위한 실험이었다. 비록 교육을 통한 감응의 반복적 안정화 가능성까지 이 실험만으로 검증할 순 없지만, 형식 일행의 공연에 감동한 승객들이 기부한 팔십여 원은 남았다. 마침내 자선음악회에서 돌아온 형식은 일행에게 “교육”과 “실행”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민족애가 사랑의 비배타적 확산이자 도약이자 승화라면, 사랑은 목적론적으로 민족애에 종속될 것이다. 그러나 민족애가 정의 교육 가능성을 확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기도 하다면, 그것은 목적지인 동시에 지속 가능한 사랑으로의 ‘하강’을 예비하기 위한 경유지가 될 수도 있다. 정말 그럴까?

3. 사랑은… 국밥이라니까

결말로 곧장 나아가기 전에 정이라는 주제를 좀 더 탐구해 보자. 사랑은 결단을 요구한다. 그러나 결단했다는 선언으로 사랑이 완성되진 않는다. 사랑의 실천에는 비용이 들고, 내가 지불할 수 있는 비용은 제한적이다. 영채를 기방에서 구원하려는 형식의 노력은 비교적 비경합적 성격을 띠는 동정과 그보다 더 희소한 화폐 사이의 괴리 때문에 좌절된다. “응, 이달부터라도 지금까지 주어 오던 학생에게 일체로 돈 주기를 거절할까 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또 그 불쌍한 어린 청년들의 “이 선생님.” 하는 모양이 눈에 암암하여 차마 그럴 수도 없고.“(25화)

1절에서 나는 소설이 형식에 대해 무정하다는 판단을 내린다고 썼다. 2절에서는 형식이 원체 동정심이 많은 인물이라고 썼다. 두 사실이 병존하는 이유는, 형식의 동정심이 사유에 머무르고 실천으로 좀처럼 전환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제자들에게 돈을 줄 줄 알지만, 눈앞에서 흐느끼는 사람의 손을 잡을 줄은 모른다. 형식이 머무르는 집의 주인 되는 노파는 동정심만으로 한 사람을 구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 선생이 잘못해서 죽었구려!”

“어째서요?”

“그렇게 십여 년을 그립게 지내다가 찾아왔는데 그렇게 무정하게 구시니까.”

‘무정하게’라는 말에 형식은 놀랐다. 그래서

“무정하게? 내가 무엇을 무정하게 했어요?”

“무정하지 않구. 손이라도 따뜻이 잡아 주는 것이 아니라…….”

“손을 어떻게 잡아요?”

“손을 왜 못 잡아요? 내가 보니까 명채…….”

“명채가 아니라 영채야요.”

“옳지, 내가 보니깐 영채 씨는 선생께 마음을 바친 모양이던데. 그렇게 무정하게 어떻게 하시오. 또 간다고 할 적에도 붙들어 만류를 하든가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74화]

이 주인 노파는 형식과 함께 영채의 자초지종을 들은 직후 처음으로 영채에게 필요한 돌봄을 제공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여보, 일어나 빙수나 한잔 자시오. 좀 속이 시원하여질 테니. 이제 울으시면 어짜오? 다 팔자로 알고 참어야지. […] 자, 어서 울음 그치고 빙수나 자시오. 배도 자시구.” 하며 분주히 부엌에 가서 녹슨 식칼을 가져다가 배를 깎으면서

“여봅시오, 선생께서 좀 위로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더 울으시니…….”

“가슴이 터져 오는 것을 아니 울면 어찌하오. 이가 내 사오 년 간 양육받은 은인의 따님이오구려. 그런데 그 은인은 애매한 죄로 옥에서 죽고, 그의 아들 형제는 아버지를 좇아 죽고, 천지간에 은인의 혈육이라고는 이분네 하나뿐이오구려. 칠팔 년 동안이나 생사를 모르다가 이렇게 만나니 왜 슬프지를 아니하겠소.”

“슬프나 울면 어찌하나요.” 하고 배를 깎아 들고 영채를 한 팔로 안아 일으키면서

“초년고생은 낙의 본입니다. 너무 설워 말으시고 이 배나 하나 자시오.”

영채도 친절한 말에 감격하여 눈물을 씻고 배를 받는다. [6화]

영채 앞에서 진심으로 슬퍼하지만 울음을 울 뿐인 형식과, 배를 깎아 주며 실질적인 위로를 건네는 노파. 작가가 이 둘의 차이를 얼마나 의식적으로 재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앞선 74화의 장면과 합쳐 보면 함축은 선명해진다. 형식이 무정한 것은 동정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행동해야 할 순간에 너무 많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형식이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유로 상승하느라 구체적 타자를 돌보지 못하는 순간은 이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심지어 ‘선형이냐, 영채냐’를 고민하는 114회에서도 그는 두 여자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조선의 미래에 대한 사유로 미끄러진다. 그렇다면 형식이 삼랑진에서 수재민들을 돕기 위해 길을 안내하고 의원을 부르려 분투하는 장면은, 연애 갈등에 대한 유예인 동시에 사유가 멈춘 지점에서 정을 실천하는 순간이기도 하지 않을까? 민족애로의 ‘고양’은 사랑의 분배 불가능성이라는 문제를 추상적 층위에서 우회하는 한편 현실적 층위에서 ‘일단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실천주의적 강령으로 이행시키는 장치일지도 모른다.

자선음악회가 끝난 뒤 “과학! 과학!”을 부르짖으며 계몽의 필요성을 역설한다는 점에서, 형식의 보편주의적 지식인상은 끝끝내 포기되지 않는다. 그러나 텍스트는 보편을 지향하는 사유에서 구체를 지향하는 수행으로 이행한 흔적을 그의 “무정”함에 대한 반성의 장면에 남겨 두었다. 처음에 형식이 주목하는 것은 자신이 영채를 동정할 수 있는가, 실제로 동정하였는가, 영채의 죽음에 얼마나 큰 슬픔을 느끼는가이다. 그러나 그 후 그의 자책은 내면의 진실이 아니라 부작위에로 향한다.

형식은 과연 무정하였다. 형식은 마땅히 그때 우선에게서 꾼 돈 오 원을 가지고 평양으로 내려갔어야 할 것이다. 가서 시체를 찾아 힘 및는 데까지는 후하게 장례를 지내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 혼인을 하더라도 인정상 다만 일 년이라도 지내었어야 할 것이다. 자기를 위하여 칠팔 년 고절을 지키다가 마침내 자기를 위하여 몸을 버리고 목숨을 버린 영채를 위하여 마땅히 아프게 울어서 조상하였어야 할 것이다. [105화]

서술자가 앞 맥락으로부터 형식의 내면을 이어 받아 자유간접화법으로 전달하는 이 인용문에서, ‘형식은 실제로는 유정하였지만 자신의 유정함을 표현으로 옮기지 못했다’ 따위의 변호는 상상되지 않는다. 형식이 영채를 조상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형식의 무정함에 대한 증거로 확신된다. 2절을 읽으며 혹자는 예술이나 교육 같은 외적 매개로 그 동력을 공급받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정』은 형식의 무정함을 기소하다가 문제의 층위를 내면에서 실천으로 옮겨 놓는다. 손을 잡고, 배를 깎아 주고, 그녀의 정절을 의심하느라 그녀를 붙들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을 떠나보내지 않으려는 의지―이런 의지를 낳지 않는 정은 진정한 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4. 사랑했어… 사랑하지 않았어… 아니, 사랑했던 것 같아…

그렇지만 내가 너를 구제하려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내면의 진실이 먼저 자각되어야 하지 않을까? 달리 말해, 수행에는 그것에 선행하는 내면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통속적 해설 하나를 수정할 필요가 있겠다. 형식의 연애 고민이 삼랑진 수해 장면에서 봉합되었다는 해설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삼랑진 에피소드가 봉합한 것은 형식을 향한 영채의 앙금과 영채를 향한 선형의 질투다. 형식의 내적 갈등은 기차가 삼랑진에서 멈추기 전에 봉합되었다.

형식은 결코 지금까지 장난으로 선형을 사랑한 것도 아니요, 육욕으로 사랑한 것도 아니었다. […] 그러나 이제 생각하여 보건댄 자기의 선형에게 대한 사랑은 너무 유치한 것이었다. 너무 근거가 박약하고 내용이 빈약한 것이었다. […]

자기는 아직 인생을 깨달을 때도 아니요, 따라서 사랑을 의논할 때도 아님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자기가 오늘날까지 여러 학생에게 문명을 가르치고 인생을 가르친 것이 극히 외람된 일인 줄도 깨달았다. 자기는 아직도 어린애다. 마치 어른 없는 사회에 처하였으므로 스스로 어른인 체하던 것인 줄을 깨달으며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도 난다.

[…] 형식의 생각에 선형은 자기의 아내라고 하는 것보다 같이 손을 끌고 길을 찾아가는 부모 잃은 누이라는 생각이 난다.

옳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배우러 간다. 네나 내나 다 어린애이므로 멀리멀리 문명한 나라로 배우러 간다. 형식은 저편 차에 있는 영채와 병욱을 생각한다. ‘불쌍한 처녀들!’ 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세 처녀가 다 같이 사랑스러워지고 정다워진다. [115화]

형식은 선형과 영채를 정다운 누이로 상상함으로써 선택의 문제를 봉합한다. 사랑은 배타적이지만 누이는 얼마든지 늘릴 수 있다. 누이와 결혼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이런 탈성애화가 진정한 해소일 수 없음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장난”이 아니었던 사랑을 여기서 그가 “유치한” 사랑으로 평가절하한다는 사실이다. 『무정』에서 계몽은 단지 타자들보다 먼저 각성하는 일에 머물지 않는다. 계몽은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해석권을 획득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해석은 과거의 진실로까지 소급할 수 있다. 영채를 가볍게 희롱하는 듯 보였던 형식의 친구 우선이 사실은 영채를 깊이 사랑했다든가, 영채의 ‘어머니’ 되는 기생집 노파도 사실은 영채를 깊이 아꼈다든가 하는 소급적 재서술이 이 소설에서는 연달아 등장한다. 영채가 평양행 기차를 타고 자살하러 가던 날 우연히 병욱을 만나 각성하는 장면을 살펴보자.

여학생은 영채의 신세타령을 듣고 “그러면 지금도 그(형식)를 사랑하시오?”

사랑하느냐 하는 말에 영채는 가슴이 뜨끔하였다. 과연 자기가 형식을 사랑하였는가, 알 수가 없다. 자기는 다만 형식이란 사람은 자기가 찾아야 할 사람, 섬겨야 할 사람으로 알았을 뿐이요, 칠팔 년래로 일찍 형식을 사랑하는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다만 어서 형식을 찾고 싶다, 어서 만나면 자기의 소원을 이루겠다, 만나면 기쁘겠다 하였을 뿐이다. […]

“그러면 지금은 그에게 대해서는 별로 사랑이 없습니다그려.”

영채는 저도 제 생각을 모르는 모양으로 한참이나 생각하더니

“글쎄요, 만나니깐 반갑기는 반가운데 어쩐지 기다리고 바라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애요. 내 마음속에 그려 오던 사람과는 딴사람 같애요. 저도 웬일인가 했어요. 또 그이도 그다지 저를 반가워하는 것 같지도 아니하고…….” [89화]

영채가 사실 형식을 사랑하지 않았음을 자각하는 대목으로 유명한 이 부분에는 사실 미끄러짐이 있다. 병욱과의 대화로부터 영채가 스스로 깨닫는 사실은 형식을 사랑한 적 없다는 것이 아니라, 형식을 사랑하는지 자문한 적 없다는 것이다. 영채는 “저도 제 생각을 모르는 모양으로 한참이나 생각”하지만, 병욱은 ‘너는 지금 형식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판정을 그보다 앞질러 내린다. 영채보다 앞서 ‘깨어난’ 신여성 병욱의 발화는 정절 규범의 억압성을 인식하고 더 이상 형식을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의 층위를 넘어선다. 영채의 내면적 사실에 대한 해석적 불확정성은 병욱에 의해 정리되었다.

훗날 기차에서 형식과 재회한 영채가 설렘을 느끼자, 병욱은 형식이 이미 선형과 혼인했으며 너에게는 너의 장래가 있다는 말로 그녀의 정동을 관리하려 든다. 병욱의 선언조차 무효화하지 못한 영채의 잔여를 버려져야 할 잉여로 처리하는 것이다. 물론 영채의 정절이 아버지의 농담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이 형식을 그리워하며 울음으로 지새우던 밤들의 감정까지 지울 수는 없다. 게다가 영채뿐 아니라 형식의 사랑조차 완전히 자발적이지는 않았다는 점을 서술자는 슬쩍 지운다. 1화에서 우선은 선형에 대하여 “그가 유명한 미인이라대. 자네 힘에 웬걸 되겠나마는 잘 얼러 보게.”라며 “언제 엥게지먼트[약혼]를 하였”냐는 예언 같은 농담을 형식에게 건넸다. 선형을 만나기 전부터 형식의 머릿속에 그녀는 잠재적 약혼 상대로 코딩되어 있었다. 결국 형식의 사랑이든 영채의 사랑이든 매개 없이 자생적으로 출현하지 않았다는 점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나 형식은 선형을 향한 사랑을 “유치”했다고 재평가할 뿐 그 기원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다. 반면 영채를 구원하고 구원하여 사랑하리라던 결심은 “다만 선형은 자기의 힘이 미치 못할 달 속의 계수나무 가지요, 영채는 자기가 꺾으려면 꺾을 수 있는 길가의 행화 가지였”기 때문에 영채를 차선책으로 취하려 했다는 설명으로 소급 강등된다.

모든 세부 사항을 확정할 수 없는 실시간 연재 환경과 작가의 편의주의적 서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는 남는다. 계몽은 언제나 나 또는 타자의 현재와 과거를 다시 쓰는 일이다. 그리고 『무정』이 재현하는 주인공은 계몽을 완성한 선각자가 아니라 수 차례 각성을 거듭하고 이전의 각성을 철회하면서 비선형적으로 성장하는 준비된 사람이다. 삼각 관계 연애 소설로부터 최후반부에 급속하게 계몽주의로 이행한다는 통상적 요약과 달리, 『무정』에서 삼각 관계가 양자택일의 문제로 대두되는 시점은 후반부다. 전반부는 대개 형식과 영채가 서로의 내면을 탐색하는 심리 게임으로, 중반부는 대개 병욱을 만난 영채의 자살 철회와 영채가 죽었다는 오인 위에서 형식이 선형과 약혼한다는 거짓 해결의 서사로 주조되어 있다. ‘이형식이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문제가 뒤늦게 등장한다는 점은 사소하지 않다. 형식이 처음부터 자유 연애를 통해 사랑을 성취한다면 이 소설은 완성된 선각자의 삶을 그대로 따라가는 영웅소설의 반향이 되고 말 것이다. 이광수가 바라보는 조선은 진정한 사랑의 가능성이 나쁜 혼인 풍습에 의해 봉쇄된 세계였고 따라서 형식과 영채가 바로 그 사실을 깨닫는 성장의 장면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각성은 기왕의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변을 찾는 계기일 뿐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는 계기이기도 해야 했다.

이 지점에서 형식의 연애 갈등이 왜 양자택일로 귀결되지 말아야 했는지가 분명해진다. 형식은 자신이 진정한 사랑을 해 본 적 없음을 이제 막 알았다. 그러니 지금 누굴 사랑하는지를 선택해 버리면 이것은 명백한 가짜 해결이 된다. 답변의 지연은 삼랑진 에피소드라는 우연적 사건의 귀결이 아니라 내가 “어린애”라는 사실을 방금 막 깨달은 주체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였다. 물론 오늘날의 독자라면 더 책임감 있는 방식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형식이 영채와 선형 양자에게 아직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말의 수행적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지금은 너희 둘 다 사랑한다는 말은 청자 입장에서 사실상 아무도 참되게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들린다.

형식은 참된 사랑이 한 명을 향해야 한다고 믿을 뿐 아니라 영채와 선형이 그 믿음을 공유한다는 사실도 안다. 내면이 수행에 앞서는지 수행으로부터 따라 나오는지는 여기서 반드시 답해져야 할 문제가 아니다. 단지 나의 내면이 타자에게 드러나는 방식은 오직 수행뿐이라는 사실만 주어져도 충분하다. 누굴 사랑하는지를 솔직하게 말하면 사랑한다는 명제 자체가 의심의 대상이 되고, 사랑한다는 명제가 확증되려면 나의 감정에 저항해야 하는 딜레마. 이광수는 이 해소 불가능한 문제를 해소 불필요한 문제로 전환하는 길을 선택했다. 선형과 영채가 수재민을 도우며 서로에게 애틋한 정을 느끼고 적대를 철회하기 시작하면 형식의 내면은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대가는 유예가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의 희석이다. 형식의 유예는 사실상 선형과의 약혼이라는 현상을 유지하는 선택이었다.

5. 따뜻한 국밥 딱 한 그릇

삼랑진 수해 장면은 종종 구체적인 연애 관계에서 추상적인 민족애로의 이동으로 해석됐다. 그러나 실상을 살펴보면 『무정』에서 민족애가 발원하는 장면은 추상성과 거리가 멀다. 처음 신문을 통해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에 홍수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형식 일행은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이것은 형식이나 선형에게 별로 중대한 일은 아니었다. 철로길이 상하면 여관에 들어 기다리면 그만이었다.”(109화) 이들이 수재민을 구제해야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선로 고장으로 운행이 중단된 열차를 빠져나와 여관으로 향하다가 재난 현장과 맞닥뜨리는 순간이었다. 정의 생성이 얼마나 편파적일 수 있는지를 텍스트는 끝까지 외면하지 않았다. 동정은 타자가 눈앞에 도착하는 순간 출현했다. 자선음악회가 돈을 그러모은 것은 저곳에 있는 타자를 이곳에서 재현(represent)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와 근접할 때, 내가 그를 피하기 어려울 때, 동정은 비로소 화폐로 전환된다.

이제 형식의 연설을 들어 보자. “이 차표 속에는 저기서 들들 떠는 저 사람들…… 아까 그 젊은 사람의 땀도 몇 방울 들었어요! 부디 다시는 이러한 불쌍한 경우를 당하지 말게 하여 달라고요.”(124화) 만약 그의 동정과 부채감이 진심이라면, 한 가지 방책을 제안해 볼 수 있다.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학비 전액을 수재민들의 생활 재건에 쓰면 어떻겠는가. 형식은 지금 여기서 돈을 다 써 버리는 것보다 문명국에서 배워 오는 것이 훗날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면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을 먹이기 위한 팔십여 원을 승객들에게서 거둬들인 이유는 무엇이었나? 당장 굶주린 자들의 필요를 해결하는 일이 급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얼마나 급한 일인지는 누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수재민을 위한 국밥 한 그릇이 급하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딱 한 그릇이어야 되는가? 두 그릇까지는 안 되는가? 그들의 집을 다시 짓는 일도 급하지 않을까? 형식과 영채 사이에서 책임 있는 결단을 내리는 일은 급하지 않을까?

요는 형식이 무한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책임지지 않는 영역을 텍스트가 비가시화한다는 것이다. 오늘 수재민에게 국밥 한 그릇을 사 주기로 선택하는 것은 그 시간에 할 수 있었던 다른 무언가를 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경제학에서 기회비용이라고 부르는 문제다. 앞서 살폈듯 실천 없는 정이 공허한 수사에 불과하다면, 그리고 물질로 매개되지 않는 실천이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어렵다면, 정은 분배의 정치경제학이라는 문제를 회피할 수 없다. 사랑은 바로 그 분배의 문제를 가장 극단적으로 가시화한 정이다. 선형과 영채를 동시에 사랑하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배우자의 자리에 올 수 있는 사람은 한 명이고, 재산을 공유하고 상속할 수 있는 사람도 당연히 한 명이다. 형식에게 이러한 제도적 사실을 합당하다고 받아들여야만 할 당위는 없다. 그러나 이 모든 현실 앞에서 침묵하겠다는 선택이 공짜인 것도 아니다. 영채에게서 선형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문제와 형식의 확답을 듣는 문제는 전혀 다른 사안이다. 선택의 유예는 유예의 비용을 외부화할 수 있는 사람에게 특권적으로 더 고려할 만한 사안이 된다.

형식은 “인정상 다만 일 년이라도” 영채를 조상했어야 했다며 자신의 무정함을 후회했다. 그런데 영채를 위한 애도는 선형과의 유학을 무산시키거나 최소한 유보할 것을 요구한다. 조상과 유학을 동시에 해낼 수는 없다. 무정하지 않으려는 인간은 단지 유정한 태도를 유지하려 힘쓰기를 넘어, 비동시적이어야만 하는 실천들에 유한한 시간을 분배해야 한다. 계몽이 먼저라면 애도가 미뤄지고, 애도가 먼저라면 계몽이 미뤄진다. 그리고 『무정』의 마지막 화는 노골적으로 계몽에 손을 들어 준다. 서술자는 다같이 유정한 세상을 만들자고 외치지만 사랑으로의 ‘하강’은 예고조차 되지 않는다. 형식 일행이 문명국에서 높은 성적으로 수학하는 동안, 서술자가 제안하는 바는 “기쁜 웃음과 만세의 부르짖음으로 지나간 세상을 조상하는 『무정』을 마치자”는 것이다. 누구에게 무엇이 지나갔는가? 한 해의 달력이 넘어간다고 해서 모두에게 같은 시간이 지나간 것은 아니다. 유년기에 고아로 자란 형식의 과거가 누군가의 현재라면, 지나간 세상을 조상하자는 제안은 비윤리적이기에 앞서 실현 불가능하다.

『무정』의 사랑학은 민족애의 실천을 지금-여기의 문제로 당기고, 연애 갈등의 해결을 나중의 문제로 밀어내면서 유정해질 세계를 꿈꿨다. 식민지 조선이라는 현실 앞에서 사랑을 사랑으로 온존하는 제국적 특권을 당대의 지식인이 누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과 사회를 정으로 매개한다는 기획은 조선식의 사회학적 상상력을 배태하는 절박한 꿈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을 민족의 바깥에 격리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사랑이 기껏해야 기약 없는 미래의 위상에 배치될 때, 민족적 사명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느냐는 물음을 망각하기 시작한다. 선형이 형식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텍스트는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선형이라면, 눈앞의 수재민들처럼 나를 회피할 수 없는 자리에 형식을 어떻게든 붙들어 매고 싶었을 것 같다. “이형식, 그래서 넌 누굴 사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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